원문출처 : 빙하 속의 기억

흔히들 여자는 버드나무 팔자라고 하더군요.

여자와 버드나무는 자갈밭에 던져만 놓아도

살아갈 수 있다고 하더군요.

흙에 거꾸로 꽂아도 정수리에서 뿌리가 나온다고 하더군요.



바람에 머리를 감으면서 순하디 순한 초록색으로 속삭이는

예쁜 잎사귀들.

작은 가지 하나 툭 건드려도 비명을 지르면서 엄살 피울 것처럼

여리디 여린 그 몸 어디에 그토록 질기고도

독한 목숨이 숨겨져 있는가 생각하면 가끔 섬뜩해지더라구요.



젊으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삶의 자갈밭에 던져진 내 목숨 역시

버드나무처럼 강인하게 뿌리를 내렸던 걸까요?

운명에 의해 곤두박질 당하던 순간,

거꾸로 처박힌 정수리로 역류하는 피.

자신의 우주가 파괴되려는 절체절명의 그 순간,



이건 정수리가 아니야, 이건 발이야.

딛고 일어서야 해. 어서 뿌리를 내려야 해.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면

버드나무는 정수리를 발이라고 억지로라도 우기면서

마침내 자신의 정수리에서 돋아난 뿌리로

세상을 딛고 서서 두 새끼를 키웠을까요?














여자는 또 뒤웅박 팔자라고 하더군요.

박을 켜지 아니하고 윗부분만 따서 건조시킨 뒤웅박 말이에요.

사람들은 뒤웅박에 어떤 물건을 담느냐에 따라

뒤웅박에 대한 대접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우리 조상들은 뒤웅박 속에 주로 씨앗을 비롯해서 이미 말렸거나

건조시킬 물건들을 담아 두었다고 하더군요.



박이 켜지면 바가지가 되어 부엌에,

조롱박이 켜지면 표주박이 되어 맑은 샘터나 뒤주 속에 놓여서

그 쓰임새가 한결같았겠지만

뒤웅박은 자신에게 담긴 내용물에 따라 이미 운명이 달라져 버린 셈인가요?



소중한 씨앗이 담기기도 하고,

술이 담기기도 하고,

심지어 칙간의 똥통 속에 오랜 기간 처박혀 있다가

곤장이나 매질을 비롯한 구타 때문에 杖毒(장독)이라도 오른 사람들이 있다면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올 수도 있었겠지요.



그 긴 세월 동안

세상의 온갖 즘생들 중에서 가장 추악하고 더럽다는 인간들이

그들이 가진 것 중에서도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것들을 쏟아낸 오물 속에 갇혀서

모았던 몇 웅큼의 맑은 물.

그 소중한 것을 다내어주고선

이내 짓밟혀서 깨어지거나 두엄 위에 던져지기도 했겠지요.









아주 오래 전이었어요.

<생인손>이란 텔레비전 드라머를 잠깐 본 적이 있어요.

저는 텔레비전에서 드라머를 거의 보지 않는데,

소위 국어라고 이름 붙은 학문을

다른 분야를 공부한 사람들보다 약간 많이 했다고 하는 제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생인손>이란 어휘 때문이었어요.

국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제가 <생인손>의 뜻을 꼭 알아야할 필요성은 물론이고

절박한 이유또한 전혀 없었기에 이내 잊어 버리곤 했었지요.



우연히 <생인손>이란 제목의 드라머가 시작될 무렵에

텔레비전이라도 켜게 되면 극 속으로 몇 번 빨려들어 가면서

이거 끝나면 찾아봐야지 하면서도 이내 잊어 버리기를 몇 번 반복했지요.



그렇게 드문드문 보았던 드라머 <생인손>



저는 아직 국어사전에서 <생인손>을 찾아보지 않았어요.

그러나 드라머의 초반부를 통해 이내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었지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생손가락을 앓는 것>을

<생인손을 앓다>라고 말하더군요.

<생인손>의 뜻을 알게 된 후에는 그다지 흥미롭게 보지 않고

극의 종결 부분을 또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요.



작가가 말하고자 한 뜻은

<인간의 운명은 거스릴 수 없다>로 결론 내릴 수도 있더군요.



어느 지체 높은 가문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두 명의 여자 아이가 태어났어요.

한 아이는 지체 높은 가문의 딸로 태어났으며,

한 아이는 그 집 노비의 딸이었지요.

그런데 지체 높은 가문의 마님의 젖이 모자랐기에,

마님과 함께 출산한 노비는 상전의 딸에게 자신의 젖을 물려야 했지요.

어느 날, 그 가엾은 노비는 자신의 갓난 딸이 골방에 홀로 버려져서

생인손을 앓으면서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모질게 마음 먹고 자신의 딸과 상전의 딸을 바꿔 버린 게지요.



구한 말.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세월이 흘렀어요.

상전의 딸을 자기 딸로 만든 노비.

그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요.

상전의 딸은 노비의 딸이 되어서 홀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잘 살더군요.



이제 늙을 대로 늙은 그 옛날의 노비.

어느 날, 새로 온 파출부의 엄지손가락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선

그녀 삶의 내력을 묻습니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갓난아기였을 때, 생인손을 심하게 앓았다는 흔적은......

그녀에게 있어선 죄의 생생한 흔적이 되어......



처음에는 혼자 생인손을 앓고 있는 갓난 딸이 가엾어서,

목숨을 걸고선 그 생인손이 나을 동안만이라도

상전의 딸과 바꿔치기했겠지요.

그러나 그 행위는 두 여자의 운명을 바꾸어 버렸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찾아 간 셈이지요.



내 목숨을 걸고 팔자를 바꾸어 주었건만, 제 팔자는 하늘도 어쩌는 수가 없구나.



세상이 바뀌었어도, 한참을 뒤바뀌었어도

아직도 노비 신세와 다를 바 없이 고달프게 살고 있는 딸을 대하면서

늙은 노비는 탄식을 하지요.









생인손



내, 인생.













구비구비 펼쳐보면 소설이 몇 권이다.



어느 날, 그 아이는 말했지요.

그 아이는 국군 간호장교입니다.



그야말로 청상과부가 된 저는 세상 속으로 숨어 버렸어요.

아주 극소수의 친구들과 전화번호가 바뀌지 않았다면 1년 혹은 몇 년만에

살아있다는 안부 정도나 물으면서요.

그렇게 살아 가면서 많은 세월이 흘렀던 어느 날.

다모임 동문 싸이트에 저를 찾는 글이 올랐다는 말을 전해듣고,

아주 힘겹게 그곳을 찾아가서 가입했지요.

그 글에 반가움의 답글을 달면서

정겨웠던 친구들 몇 명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적었지요.



그런 뒤에 또 시간이 흘렀어요.

제 답글 밑에

<나는 그립지 않았니?

나는 은아 네 생각을 얼마나 했는데 너는 내가 생각나지 않더냐>는 글이 달렸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지요.

아..... 난들 그 아이를 잊은 적 없었지만 왜 제가 나열했던 친구들 몇 명의 이름 중에

그 아이의 이름이 빠졌던 것인지 저도 이해할 수 없었지요.

내 인생 속에서

불 꺼진 듯 숨 죽이고 숨어 살면서도 늘 그리웠던 친구였는데......



그 아이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대학시절 가을이었지요.

그 아이가 다니던 간호사관학교의 <가관식>이었던지,

<임관식>이 있었던 날.

초대를 받아 참석했지요.

우리의 교류는 더 오랫동안 계속되었지만

그 아이와의 기억은 언제나 거기에서 단절되어 버렸어요.

그게 그 아이와의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다모임을 통해서 다시 만나게 되었지요.



그 아이는 어느 국군 간호대학교에서 교무처장도 역임했으며,

지금은 다시 군으로 돌아가서 간호장교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진급을 할 수 없어서,

정년 1년을 앞둔 싯점이 되면, 명예퇴직금이라도 추가로 받기 위해

명퇴신청을 한다고 합니다.

남은 임기가 1년에서 하루만 모자라도 명퇴금을 받을 수 없다네요.

그 아이는 명퇴를 하면 미국에 간호사로 가겠다고

지금 영어회화 학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쉰 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취업하기 위해 떠날 준비를 하면서

영어 회화 학원에 다니는 그녀.

30년의 세월을 간호장교로 일한 것도 모자라서 낯선 나라로

취업하기 위해 떠날 거라는 그녀.

우리 나라에서는 쉰 살의 나이에 간호사 일자리를 구할 수 없지만,

미국에서는 언어만 능숙하면 쉽다네요.



내, 인생.

구비구비 펼쳐보면 소설이 몇 권이다.



병아리 장교 시절.

한 남자를 알았답니다.

결혼까지 약속했지만, 자신이 강원도쪽으로 발령이 나면서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자......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나 봅니다.

강원도 첩첩산골에서 남자의 마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그녀.

어느 날 그녀를 찾아온 남자.

3년만 기다려 달라고........

하루 동안 한 생애를 사는 것처럼 3년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만 그 남자.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 버렸답니다.



세상이 무너져 내린 그녀.

절벽 앞에 선 그녀에게 나타난 새 남자.

도무지 새 남자를 받아 들일 수 없어서,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했답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겠다면서......

그녀의 마음이 자신에게 열릴 때까지 기다리겠다던 새 남자.

당시로서 새남자는 그녀에게 있어서 구원이 아니었을까요?

숱한 날을 <자살>의 질긴 유혹의 손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하다가

구원의 손길을 붙잡듯 새 남자와 결혼했다는 그녀.

결혼한 뒤에도 아무리 노력했지만 옛 남자의 그림자를 털어버릴 수 없었다는 그녀.



그러는 동안 아이가 태어나자...... 변해 버린 남편.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것까지야

옛남자의 그림자를 털어내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하기에

참고 견디었지만......



옛남자와 입맞춤 한 번 해 본 적 없는데,

자기 자식이란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남편이

태어난 아이까지 <이 자식이 그놈 새끼지?>하면서 생억지의 포악을 부리는데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던 그녀.

남편의 간통 앞에서 위자료 한 푼 아니 받고,

오로지 자식에 대한 친권만을 보장받으면서 이혼을 했다는 그녀.



혼자 키운 그 아들은 의대생으로 잘 자라주었지요.

그 녀석을 끝까지 뒷바라지하려면 군인 연금으로는 턱도 없어서

명퇴한 다음에는 미국으로 직장을 찾아 갈 거라면서

쉰 살의 나이에 영어 학원에 다니는 그녀.



자신의 인생을 그토록 찢어발겨 버린 옛남자.

지금은 어느 은행의 은행장이 되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네요.



-지점장도 아니고, 은행장이야.

그에게 있어서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이 두렵겠지.



-나쁜 자식.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

야, 이 바보야.

너도 이제 그 남자.

그 나쁜 자식은 그만 잊어 버리고

사랑도 하고, 인생도 즐기면서

마음껏 행복하게..... 적어도 그 남자보다는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할 거 아냐?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듣다가 도리어 내가 흥분되어

눈물을 글썽이면서 욕설을 뱉어내고 말았던 나.



-난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겠니?

그런데 그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사랑하는......

그가 아닌 어떤 남자도 사랑할 수 없는 내 자신이 참 혐오스럽다.



참 웃기는 말인데......내겐 아직도 그 사람만이 내 남자야.

입맞춤 한 번 한 적 없는,

이미 오래 전에 나를 버리고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된,

다른 여자가 낳은 애들 아빠가 된 그 사람은 아직도 내 남자야.

아직도 그를 사랑해.



예정대로 내가 그와 결혼하였다면 나는 지금 어느 은행장 사모님이 되어

상류층의 삶을 누리고 있을까?

내 팔자가 아니라서 그를 놓쳤던 걸까?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를 내게서 빼앗아간 여자가

나보다 키가 크다는 것 외에는 학벌이나 그 어떤 것을 보아도

나보다 나은 조건이 없다는 거야.

참 알 수 없는 것이 우리 여자들의 운명이다.

이래저래 내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면, 몇 권이다야.



그녀는 물기어린 목소리로 씁쓸하게 웃었지요.









뒤웅박



한 이십 일쯤 전이었을까요?

낯선 전화 한통을 받았어요.



-네, 김은아입니다.



휴대폰 뚜껑을 열어,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으면서 난 습관적으로 말했지요.



-혹시 S여중 출신 아닌가요?



전혀 들었던 기억이 없는, 맑고 빠른 여인의 음성에 저는 당황할 수밖에요.

느닷 없이 출신 중학교를 묻는다면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그리 흔할까요?



왜 그러시냐고 물을 수밖에 없는 나.



전화를 건 여인은 제 중학교 동기였어요.

제 책을 자신의 친구에게서 선물받았기에

혹시나 하고 전화를 해보았다네요.



그 아이와 난 한 반이 되었던 적은 없었지만,

영어와 수학 선생님에게서 과외를 함께 받았으며

그 아이는 학급의 반장으로

저는 전교 학생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서로의 이름 정도는 기억해 낼 수 있었지요.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그 아이는 서울로, 저는 부산으로 진학하였기에

여중 시절 이름 정도 알았던 우리는 서로에게서 완벽하게 잊혀지긴 했어도......

.

.

.

남편이 대한민국 검찰에서도 최고위 간부 중의 한 사람이라는 그녀.

작가 서명한 책을 그 아이의 주소로 보내면서 저는 따뜻하게 웃었지요.



유복한 집안에서, 곱고 순탄하게 자라

이 땅의 여자들이라면 모두들 부러워하는 최고의 명문여대를 나와서,

좋은 남편을 만나서 다복하게 살고 있구나.



예전의 나였더라면 아마......부러움 속에서도 필경 질투하였을 거예요.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쉰 살의 나이가 되자......나는 이제 친구들의 행복하고 다복한 모습을 보거나 들어도

부러워는 할지언정 질투심이 전혀 생기지 않더라구요.



예순 살이 되면, 부러워하지 않을지도 몰라.



난 아득하게 웃었지요.



살고 있는 아파트 이름도 신분에 걸맞구나.

그녀가 살고 있는 주소를 적으면서

나는 마치 그녀가 신분과 계급의 차별이 없다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새롭게 탄생한 또 다른 로얄 패밀리처럼 생각되어 따뜻하게 부러워하였지요.



적어도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친구들 중에서

삶의 내력과 학력과 신분과 생활 정도를 통털어서 가장 상류층이었으니까요.

부로 따진다면야,

오래 전에 대도시 고등학교에 고교 평준화가 실시되어서 그렇지 않지만

당시에는 부잣집의 골빈 딸들이 많이 다닌다고 알려졌던 사립 여학교였던

-이거 모교 모독죄에 해당될려나? 그러나 사실이었던 걸요.-

제 여고시절 동기 중에서야 그녀보다도 더 부자 친구도 많이 있겠지만요.



유복하고 따뜻한 가정에서 태어나,

그에 걸맞는 환경 속에서

그에 걸맞는 교육을 받고,

그에 걸맞는 남편을 만나

여전히 유복하고 따뜻하고 향기로운 삶을 누리는 그녀.



그녀의 뒤웅박 속에는 처음부터 소중한 그 무엇이 담겨져 있었는데,

그 소중한 것이 끝까지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구나 생각하면서 따듯하게 부러워하였지요.







뒤웅박



한 이십 일쯤 전이었을까요?

낯선 전화 한통을 받았어요.



-네, 김은아입니다.



휴대폰 뚜껑을 열어,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으면서 난 습관적으로 말했지요.



-혹시 S여중 출신 아닌가요?



전혀 들었던 기억이 없는, 맑고 빠른 여인의 음성에 저는 당황할 수밖에요.

느닷 없이 출신 중학교를 묻는다면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그리 흔할까요?



왜 그러시냐고 물을 수밖에 없는 나.



전화를 건 여인은 제 중학교 동기였어요.

제 책을 자신의 친구에게서 선물받았기에

혹시나 하고 전화를 해보았다네요.



그 아이와 난 한 반이 되었던 적은 없었지만,

영어와 수학 선생님에게서 과외를 함께 받았으며

그 아이는 학급의 반장으로

저는 전교 학생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서로의 이름 정도는 기억해 낼 수 있었지요.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그 아이는 서울로, 저는 부산으로 진학하였기에

여중 시절 이름 정도 알았던 우리는 서로에게서 완벽하게 잊혀지긴 했어도......

.

.

.

남편이 대한민국 검찰에서도 최고위 간부 중의 한 사람이라는 그녀.

작가 서명한 책을 그 아이의 주소로 보내면서 저는 따뜻하게 웃었지요.



유복한 집안에서, 곱고 순탄하게 자라

이 땅의 여자들이라면 모두들 부러워하는 최고의 명문여대를 나와서,

좋은 남편을 만나서 다복하게 살고 있구나.



예전의 나였더라면 아마......부러움 속에서도 필경 질투하였을 거예요.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쉰 살의 나이가 되자......나는 이제 친구들의 행복하고 다복한 모습을 보거나 들어도

부러워는 할지언정 질투심이 전혀 생기지 않더라구요.



예순 살이 되면, 부러워하지 않을지도 몰라.



난 아득하게 웃었지요.



살고 있는 아파트 이름도 신분에 걸맞구나.

그녀가 살고 있는 주소를 적으면서

나는 마치 그녀가 신분과 계급의 차별이 없다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새롭게 탄생한 또 다른 로얄 패밀리처럼 생각되어 따뜻하게 부러워하였지요.



적어도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친구들 중에서

삶의 내력과 학력과 신분과 생활 정도를 통털어서 가장 상류층이었으니까요.

부로 따진다면야,

오래 전에 대도시 고등학교에 고교 평준화가 실시되어서 그렇지 않지만

당시에는 부잣집의 골빈 딸들이 많이 다닌다고 알려졌던 사립 여학교였던

-이거 모교 모독죄에 해당될려나? 그러나 사실이었던 걸요.-

제 여고시절 동기 중에서야 그녀보다도 더 부자 친구도 많이 있겠지만요.



유복하고 따뜻한 가정에서 태어나,

그에 걸맞는 환경 속에서

그에 걸맞는 교육을 받고,

그에 걸맞는 남편을 만나

여전히 유복하고 따뜻하고 향기로운 삶을 누리는 그녀.



그녀의 뒤웅박 속에는 처음부터 소중한 그 무엇이 담겨져 있었는데,

그 소중한 것이 끝까지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구나 생각하면서 따듯하게 부러워하였지요.





버드나무



-은아야. 미안했어.



어제 네 전화를 받고, 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넌 사투리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대뜸 <은아야, 미안했어.>란 네 말에서는 부산 특유의 강한 억양과 함께

빠르고 명랑한 어조가 종달새가 지저귀듯이 흘러나왔으니까.



아...... 생각하면 괘씸하기도 하지만, 마음 한 켠이 늘 아리던 너.



3-4년 전이었던가?

내가 자궁적출 수술을 끝내고,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늦게 마취에서 깨어나서 하루나 지났을까?

움직이지도 못할 때였지.

그날도 넌 한 두해쯤 연락이 없다가 어제처럼 갑자기 내게 전화를 했었어.



-세상에 살다 보니 이럴 때가 다 있네.

지금 남편은 해외출장 중인데 몇 푼 되지도 않은 어음이 부도나게 생겼어.

내가 갖고 있는 돈을 모두 털었는데도 50만원이 모자란다, 야.

친정 부모님들은 여행 떠났는데 오늘 밤에 돌아 오신댄다.

네가 오십 만원만 보내주면 내일 꼭 돌려줄게.



-나, 지금 수술했어.

병원에 입원 중이야.



-그래도 걸을 수는 있지? 병원에 현금지급기 있을 거 아냐?

힘들겠지만 내 통장으로 50만원만 입금시켜 줄래.



어음이 어떤 경우에 부도가 나는지도 모르는 나는

어음이 부도 나면 회사가 망한다고 알고 있던 나는

얼마나 급했기에 나에게 전화를 했나 싶어서

앞뒤 생각 없이 그 상황에서도 네가 부탁한 돈을 통장에 입금시켰는데......

넌 그 돈을 돌려주지 않았어.



그 뒤, 병문안 왔던 친구들에게서 네 소식을 들었지.

네 친정 회사도 남편 회사도 시동생 회사도 서로 맞보증을 서서

한쪽이 무너지자 줄줄이 무너지고 네 가족들은 줄행랑을 놓았다는 사실을.

친구들 두어 명도 그런 식으로 너에게

몇 백 만원에서 몇 천만원까지 빌려 주었다고......



그래도 나는 겨우 50만원이네.

초등학교 선생이라서 많이 봐 주었나 봐.



난 속으로 웃었지.



그동안 내가 고급 레스토랑에서, 좋은 호텔에서

그 아이에게 얻어 먹은 것만 해도 50만원 어치는 넘을 거야.



내 돈이 아깝기는 했지만, 난 네 처지가 더욱 안타까웠어.



그런데 어제 네가 전화를 했어.

그리고 넌 우리집을 찾았어.



-미안해.

그 돈으로 애들 등록금 냈어.



내 돈으로 한 분기의 등록금을 해결했다는

그 두 녀석들 모두 이제 대학생이 되었다지.

지방 대학이긴 하지만 국립대학에서

장학금도 받으면서 반듯하게 자라고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

.

.

우린 낮술을 마셨어.

낮술 때문이었을까?

네 자존심이 결코 허락하지 않을 말들을 넌 하고 말았지.



밀양 인근의 어느 모텔에서 먹고 자면서 청소일을 하고 있다는 너.

예전의 富는 감히 꿈조차 꿀 수야 없겠지만

두 아들이 공무원이나 교사가 되어서

자기들 앞가림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꿈이라는 너.



낮술 때문이었을 게야.

나 역시 술에 취해서 내 자존심이 결코 허락하지 않을 말을 했어.



난 언제나 너의 풍족한 삶이 부러웠다고.

학교 다닐 때는 별 것도 아닌 애가,

부모 잘 만나서,

부모 잘 만나다 보니 남편도 잘 만나서 호의호식하면서 살아가는 너를

적당히 경멸하고

적당히 질투하면서 많이, 아주 많이 부러워했었다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네가 사주는 저녁을 먹으면서

여유롭고 우아하게 포크를 사용하는 법도 배웠다고.



모두가 낮술 때문이었을 게야.



넌 또 말했어.



이제 좀 숨을 돌릴 만하니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혼자만의 밤이라고.

남편이란 사람은 그 길로 외국으로 뺑소니치고선 연락이 끊겼다고 했지.

바람결에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온갖 잡년, 잡놈들이 질탕하게 놀다간 자리를 청소하는 것쯤이야

사십 몇 년동안 돈 무서운 줄 모르고 펑펑 써버린 댓가려니 여기고

잘 참아내고 있다고.



주인이 없었던 어느 날.

모텔에 들어와서 잠깐 그짓만 하고 가는 손님들이 있었다고 했지?

그 돈을 네 호주머니에 넣으려고 했다가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서 펑펑 울고 난 뒤에 금고에 넣었다는 너.

그렇게 씩씩하게 잘 견디고 있는데

혼자만의 밤은 정녕 견기 힘들다고.



그러면서 넌 낄낄거렸지.



우리 애들.

둘다 대학 졸업하고, 취직만 해 봐라.

그애들이 선생이나 공무원이 된다면 좋겠어.

장가는 지들이 돈 벌어서 가라고 하지.

애들 취직만 하면 그날로 나는 자유부인이다.

살든 죽든 내 맘대로라구.

한 일이년 동안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돈 모을 거다.

그런 다음에..... 힘 좋은 남정네 하나 구해서

석달 열흘을 그짓만 할 거다.

그런 다음에 그냥 콱 죽어 버릴 게다.



넌 자지러지게 웃다가 그 웃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가슴을 치더니,

그도 아니 되는 모양인지 식탁에 엎드려서

웃음을 참으려고 안간힘 쓰면서도 계속 쿡쿡거렸어.



애들 둘 다 군에 다녀와서 대학 졸업하면,

그런 뒤에도 1-2년 오로지 너만을 위한 돈 모으고 나면

예순 살쯤 되겠네.

힘 좋은 남정네 하나 구한다 해도, 네가 힘에 부쳐서 안되겠다.

석달 열흘이 아니라, 10분도 안되겠다.



난 그 말들을 삼키면서

웃음사래가 들린 듯 연신 쿡쿡거리는 네 등을 쓸어내렸어.



저녁도 먹고, 자고 가라는 내 부탁을 뿌리치고

아직도 가시지 않은 웃음사래를 털면서 일어선 너.



네가 살고 있는 물가의 아름다운 자리를 어느 날 갑자기 빼앗겨 버리고선

뿌리까지 송두리째 뽑혀서 자갈밭에 던져졌던 너.

공허하면서도 적막하게 퍼지던 네 웃음이

아직 치우지 않은 맥주병과 함께 남아있던 식탁.

식탁을 치우고, 네 웃음을 치우면서

나는 자갈밭에 던져 놓아도 창창한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한 그루의 버드나무를 본다.





그래요.

옛 사람들이 그랬듯이 우리 여자들 팔자는 버드나무 팔자이며,

뒤웅박 팔자이며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생인손을 앓듯

그렇게 운명 속에 내동댕이쳐 지기도 하겠지요.



처음부터 여자의 뒤웅박에 소중한 물건이 담기어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복된 삶을 누리면서 한 생애를 살다가 가는 이도 있을 것이며,

아예 똥깐의 오물 속에 처박히어 삶의 정수를 걸러내는 역할을 하면서도

그 임무가 끝나면 이내 짓밟히고 버려진 이도 있을 것이며,

뒤웅박 안에 소중한 물건이 담기었다가,

이내 천한 물건이 담기기도 하겠지요.

천한 물건이 담긴 뒤웅박이라 해도 때를 잘 만나 귀한 물건이 담기기도 하구요.



그러나 여자들은 자신의 뒤웅박에 어떤 물건이 담기더라도

자갈밭에 던져 놓아도,

거꾸로 꽂아놓아도 이내 버드나무처럼 목숨의 뿌리를 내리면서

한 세상을 꾸려 가겠지요.



운명의 생인손이 타고난 팔자를 바꿀 수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여자들은 주어진 생인손을 나름대로 앓으면서

버드나무처럼 질긴 목숨의 뿌리를 내리면서 살아가고 있네요.



나 역시 내 운명의 뒤웅박 안에 담긴 내용물의 가치가 어떠하든,

내가 담아야 하는 물건이 운명의 물살을 따라서 바뀐다고 해도

자갈밭에 던져 놓아도 살아갈 수 있는 버드나무처럼,

거꾸로 꽂아도 이내 뿌리를 내리는 버드나무처럼

삶의 뿌리를 튼튼하게 내리면서

내 두 자식을 키울 것입니다.

여자이기에 버드나무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머니이기에 버드나무가 될 수 있지나 않았을까요?

여자가 버드나무일 수 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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